성경의 숨은 재밌는 이야기 · 26

베드로전서,
바벨론에서
보낸 편지

세 번 넘어졌던 어부가
흩어진 나그네들에게 건넨 “산 소망”

베드로전서 1–5장
여는 글

베드로전서를 쓴 사람은 갈릴리 어부 시몬이에요. 예수님이 “반석”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셨지만, 복음서 속 베드로는 반석보다 물결 쪽에 더 가까웠어요. 😄 물 위를 걷다 빠지고, 십자가를 말씀하시는 주님을 말리다 꾸중을 듣고, 겟세마네에서 졸고, 대제사장 집 뜰에서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했어요. 그런 베드로가 인생의 끝자락에 이 편지를 써요.

그래서 베드로전서는 읽을수록 재밌어요. 편지 곳곳에 복음서의 베드로가 숨어 있거든요. 주님을 말리던 사람이 고난받는 종을 노래하고, 잠들었던 사람이 “깨어라” 하고, 발 씻기를 거절하던 사람이 “허리를 동이라” 해요. 넘어졌던 사람을 일으켜 세우신 주님의 은혜가 한 줄 한 줄에 배어 있는 편지 속으로 들어가 볼게요.

1부

베드로전서는 어떤 책일까?

고난 속 나그네들에게 보낸 “산 소망” 편지

베드로는 예루살렘 교회의 첫 지도자였고, 나중에는 아내와 함께 여러 지역을 다니며 복음을 전했어요(고전 9:5). 이 편지는 “본도, 갈라디아, 갑바도기아,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”(1:1), 곧 오늘날 튀르키예 북부와 중부의 넓은 지역에 사는 성도들에게 보낸 거예요. “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”(1:14)이라는 말처럼 이방인 출신 성도가 많았어요. 이들은 믿음 때문에 이웃에게 비방을 받으며 어려움을 겪고 있었어요(2:12; 4:4, 12). 편지를 쓴 곳은 “바벨론”(5:13), 시기는 베드로가 순교하기 전인 60년대 중반 무렵으로 봐요.

이름의 뜻예수님은 시몬을 처음 만나신 날 “게바”라는 이름을 주셨어요(요 1:42). 아람어 게바, 헬라어 페트로스, 둘 다 “돌, 반석”이라는 뜻이에요. 흔들리던 사람에게 먼저 “반석”이라는 이름을 주신 거예요.
실루아노의 손“내가 신실한 형제로 아는 실루아노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간단히 써서”(5:12). 실루아노는 바울과 함께 다닌 실라와 같은 사람으로 봐요(행 15:40; 살전 1:1). 공회가 “학문 없는 범인”(행 4:13)이라 했던 어부의 편지가 매끄러운 헬라어로 쓰인 데는 그의 도움이 있었을 거예요.

※ “실루아노로 말미암아”가 받아 적은 사람을 뜻하는지, 편지를 전달한 사람을 뜻하는지는 견해가 나뉘어요. 초대교회는 일찍부터 이 편지를 베드로의 편지로 받아들였고, 오늘날 일부 학자들은 다른 견해를 내기도 해요.

베드로전서의 큰 특징 다섯 가지
1
고난의 편지
“고난을 받다”라는 동사가 열두 번 나와요. 신약에서 이 동사가 가장 많이 나오는 책이에요.
2
나그네의 정체성
성도를 “흩어진 나그네”(1:1), “거류민과 나그네”(2:11)라고 불러요. 이 땅은 잠시 머무는 곳이에요.
3
구약이 가득
이사야, 시편, 출애굽기, 호세아, 잠언… 다섯 장 안에 구약 인용과 암시가 빼곡해요.
4
산 소망
부활하신 예수님 때문에 우리 소망은 죽은 소망이 아니라 “산 소망”(1:3)이에요.
5
은혜로 맺는 편지
편지 전체를 “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”(5:12)라는 한 마디로 묶어요.

베드로전서의 중심에는 이 찬송이 있어요. “찬송하리로다 …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”(1:3). 고난이 끝났기 때문에 소망이 있는 게 아니에요. 고난 한가운데서도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이 살아 계시기 때문에 소망이 살아 있어요. 그래서 베드로는 “너희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”(5:12)며 편지를 맺어요.

2부

더 깊이 숨은 7가지 장면

주님을 말리던 제자부터 바벨론에서 온 문안까지

1

“그리 마옵소서” 하던 제자가
고난받는 종을 노래하다

베드로전서 2:21-25 · 마태복음 16:21-23 · 요한복음 18:10 · 이사야 53:5-9
가이사랴 빌립보에서
“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”(마 16:22)
VS
베드로전서
“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”(2:24)

예수님이 처음으로 십자가를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는 주님을 붙들고 항변했어요. “주여 그리 마옵소서”(마 16:22). 메시아가 고난을 받는다는 건 상상도 못 했거든요. 그러다 “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”는 꾸중까지 들었어요. 체포되시던 밤에는 칼을 빼서 대제사장 종의 귀를 베기도 했어요(요 18:10). 😄 어떻게든 주님의 고난을 막아 보려던 사람이에요.

그 베드로가 이렇게 써요. “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”(2:23). 칼을 휘두르던 제자가, 칼을 들지 않으신 주님을 그리고 있어요. 이어지는 구절들은 이사야 53장을 따라가요. “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”(사 53:9), “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”(사 53:5), “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”(사 53:6). 베드로는 이제 알았어요. 고난은 메시아의 실패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었어요.

2:21의 “본”이라는 단어도 재밌어요. 휘포그람모스는 아이들이 글씨를 배울 때 따라 쓰던 본글씨예요. 아이가 선생님 글씨 위에 한 획 한 획 따라 쓰듯,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라는 거예요. 멋진 글씨를 우리가 새로 만드는 게 아니라, 주님이 먼저 써 주신 선 위를 따라가는 거예요.

돌아보기
고난을 피하고만 싶을 때, 나를 위해 채찍에 맞으신 주님을 바라보며 그 발자취를 따라갑니다.
2

“반석”이라 불린 사람이
“산 돌”을 가리키다

베드로전서 2:4-8 · 요한복음 1:42 · 시편 118:22 · 사도행전 4:11 · 마태복음 21:42

베드로라는 이름은 “돌”이에요. 그런데 이 편지에서 베드로는 자기 이름 이야기를 한 마디도 안 해요. 대신 다른 돌을 가리켜요. “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”(2:4). 진짜 반석은 자기가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거예요. 😄 이름 자랑할 좋은 기회를 스스로 내려놓은 셈이에요.

베드로는 돌에 관한 구약 말씀 세 곳을 엮어요. 시온에 두신 “보배로운 모퉁잇돌”(2:6; 사 28:16), “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머릿돌이 되고”(2:7; 시 118:22), “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”(2:8; 사 8:14)예요. 이 가운데 시편 118:22은 베드로에게 특별한 구절이었어요. 성전 미문의 못 걷는 사람을 일으킨 뒤 공회 앞에 섰을 때, 베드로는 바로 이 말씀으로 외쳤거든요. “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이라”(행 4:11). 그리고 이 말씀은 원래 예수님이 먼저 자신에 대해 쓰신 말씀이에요(마 21:42).

그리고 놀라운 한 마디가 붙어요. “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”(2:5). 예수님이 산 돌이시니, 그분께 붙은 사람들도 산 돌이 돼요. 돌 하나하나는 작고 보잘것없어도, 모퉁잇돌에 맞춰 쌓이면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이 돼요. 교회는 살아 계신 모퉁잇돌 위에 쌓인 돌들이에요.

※ 마태복음 16:18의 “이 반석”이 베드로 자신인지, 베드로의 신앙고백인지, 그리스도 자신인지는 교회사 속에서 오래 논의되어 왔어요.

돌아보기
내 이름이나 자리보다, 버림받으셨으나 머릿돌이 되신 예수님께 나아가 그분 위에 세워집니다.
3

빈 무덤을 구부려 보던 베드로,
천사들도 구부려 보는 복음

베드로전서 1:10-12 · 누가복음 24:12 · 요한복음 20:5, 11
부활 아침
“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부려 들여다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”(눅 24:12)
VS
베드로전서
“이것은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”(1:12)

1장에서 베드로는 복음이 얼마나 귀한지 말하면서 두 부류를 불러와요. 먼저 선지자들이에요. 그들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을 예언하면서도 그 일이 언제, 어떻게 이뤄질지 몰라 부지런히 “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폈”어요(1:10-11). 그다음은 천사들이에요. “이것은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”(1:12).

여기 “살펴보다”는 파라큅토예요. 허리를 굽혀 고개를 쑥 들이미는 모습이에요. 이 단어가 복음서 어디에 나오는지 아세요? 부활 아침, 여자들의 말을 듣고 무덤으로 달려간 베드로가 “구부려 들여다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”(눅 24:12)에 나와요. 😄 베드로는 그날 몸을 숙이고 빈 무덤을 들여다보던 자기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을지도 몰라요.

그날 베드로는 “그 된 일을 놀랍게 여기며” 집으로 돌아갔어요. 이제 베드로는 그 놀라움이 자기만의 것이 아니라고 말해요. 하늘의 천사들조차 몸을 숙이고 들여다보고 싶어 하는 이야기, 그게 바로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의 복음이에요. 그리고 그 복음이 흩어진 나그네 성도들에게, 또 오늘 우리에게 전해졌어요(1:12).

※ 같은 단어가 쓰였다는 것은 사실이지만, 베드로가 이 단어를 쓰며 빈 무덤 장면을 떠올렸는지는 본문이 말하지 않아요. 묵상으로 이어 본 연결이에요.

돌아보기
천사들도 들여다보고 싶어 하는 복음을 내가 들었음을 기억하며, 오늘 그 은혜 앞에 새삼 놀랍니다.
4

“내 백성이 아니라”던 이름이
“하나님의 백성”으로 바뀌다

베드로전서 2:9-10 · 호세아 1:6-9 · 2:23 · 출애굽기 19:5-6
호 1:6딸의 이름 “로루하마” —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한 자
호 1:9아들의 이름 “로암미” — 내 백성이 아니다
호 2:23“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… 너는 내 백성이라”
벧전 2:10“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”

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자녀들에게 참 슬픈 이름을 붙였어요. 딸은 “로루하마”, 곧 “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한 자”, 아들은 “로암미”, 곧 “내 백성이 아니다”예요. 😄 동네에서 이름 불릴 때마다 난감했을 거예요.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의 모습을 이름으로 보여 주신 거예요. 그런데 호세아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아요. 하나님은 언젠가 그 이름을 뒤집겠다고 약속하셨어요(호 2:23).

베드로는 바로 그 약속을 흩어진 성도들에게 적용해요. “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”(2:10). 이스라엘도 아니던 사람들,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던 이방인들이 “하나님의 백성”이라는 새 이름을 얻었어요.

바로 앞 절은 더 놀라워요. “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”(2:9).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출애굽한 이스라엘에게 주신 칭호예요(출 19:5-6). 그 칭호를 흩어진 이방 성도들에게 그대로 입혀 주신 거예요. 이유도 분명해요. “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”(2:9). 새 이름은 나를 불러내신 하나님을 자랑하라고 주신 이름이에요.

돌아보기
“내 백성이 아니라”던 나를 “하나님의 백성”이라 불러 주신 긍휼을 기억하며, 나를 불러내신 하나님의 덕을 선포합니다.
5

방주의 여덟 사람과
물을 통과하는 침례

베드로전서 3:18-22 · 창세기 7:13 · 로마서 6:4

3장 끝에서 베드로는 노아 이야기를 꺼내요.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사람이 “겨우 여덟 명”(3:20)이었대요. 노아와 아내, 세 아들 셈·함·야벳과 세 며느리, 모두 여덟 명이에요(창 7:13). 온 세상이 물에 잠겼는데, 방주에 들어간 사람들은 그 물을 지나 새 세상으로 나왔어요.

그리고 베드로는 바로 이어서 말해요. “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침례라”(3:21). 노아의 식구들이 물을 통과해 새 땅에 섰듯이, 침례를 받는 사람도 물에 잠겼다가 올라와요. 😄 우리 침례교회가 물에 푹 잠기는 침례를 소중히 여기는 이유가 여기 그림처럼 담겨 있어요. 옛사람은 물속에 장사되고,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새 생명으로 올라오는 거예요(롬 6:4).

그런데 베드로는 곧바로 선을 그어요. 침례는 “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”(3:21)이래요. 물 자체에 구원하는 힘이 있는 게 아니에요. 노아를 살린 것이 물이 아니라 방주였듯이, 우리를 살리는 분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예요. 침례는 그분께 나아간다는 고백이에요.

“여덟”이라는 숫자에도 이야기가 있어요. 예수님은 안식일 다음 날, 곧 한 주의 첫날에 부활하셨어요. 초대교회는 이날을 새 창조가 시작된 “여덟째 날”이라고 부르기도 했어요. 2세기 순교자 유스티누스는 방주의 여덟 사람을 바로 이 부활의 “여덟째 날”과 연결해 설명했어요.

※ 3:19의 “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”는 신약에서 가장 해석하기 어려운 구절 가운데 하나로 꼽혀요. 그리스도께서 노아를 통해 그 시대 사람들에게 전파하셨다는 견해, 부활하신 뒤 악한 영들에게 승리를 선포하셨다는 견해 등이 있어요. 유스티누스의 해석은 『트리포와의 대화』에 나와요.

돌아보기
나를 살린 것은 물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이심을 기억하며, 침례 때 드린 고백대로 오늘도 주님께 나아갑니다.
6

발 씻기를 거절하던 제자가
“허리를 동이라” 하다

베드로전서 5:1-5 · 요한복음 13:4-8 · 21:15-17
마지막 만찬
“내 발을 절대 씻기지 못하시리이다”(요 13:8)
VS
베드로전서
“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”(5:5)

5장에서 베드로는 교회 장로들에게 부탁해요. 그런데 자기소개가 참 겸손해요. “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”(5:1). 수제자라고도, 사도들의 대표라고도 하지 않아요. 그저 “함께 장로 된 자”예요. 그리고 주님의 고난을 지켜본 증인이라고 해요. 그 고난의 밤에 자기가 무슨 일을 했는지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말이에요.

그리고 부탁해요. “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”(5:2). 이 말을 들으면 갈릴리 바닷가의 아침이 떠올라요. 부활하신 주님은 세 번 주님을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세 번 물으셨어요. “네가 나를 사랑하느냐.” 그리고 세 번 맡기셨어요. “내 양을 먹이라”(요 21:15-17). 이제 베드로가 그 부탁을 다른 목자들에게 전하고 있어요. 그러면서 진짜 목자는 따로 계시다고 해요. “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”(5:4). 양은 목자들의 것이 아니라 목자장 되신 예수님의 양이에요.

5절의 “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”에도 그림이 숨어 있어요. “동이라”는 엥콤보오마이예요. 종이 일할 때 두르던 앞치마를 질끈 매는 모습이에요. 😄 “겸손이라는 앞치마를 두르라”는 거예요. 마지막 만찬 때 예수님은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어요. 그때 “내 발을 절대 씻기지 못하시리이다”(요 13:8)라고 버티던 사람이 베드로였어요. 이제 그 베드로가 성도들에게 앞치마를 두르라고 해요.

※ 베드로가 이 단어를 쓰며 요한복음 13장의 장면을 떠올렸다고 보는 해석이 있지만, 본문이 직접 그렇게 말하지는 않아요.

돌아보기
목자장 되신 예수님이 먼저 허리를 굽혀 나를 섬기셨음을 기억하며, 오늘 겸손의 앞치마를 두르고 이웃을 섬깁니다.
7

잠들었던 제자가 “깨어라” 하고,
바벨론에서 문안하다

베드로전서 5:8-13 · 마태복음 26:40-41 · 누가복음 22:31-32 · 사도행전 12:12 · 15:37-39

“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”(5:8). 이 말을 누가 하는지 생각하면 웃음이 나요. 😄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“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”(마 26:41) 하셨는데 거듭 잠들었던 사람, 바로 베드로예요. 그리고 그 밤에 시험에 넘어졌어요. 깨어 있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몸으로 배운 사람이 “깨어라” 하고 있어요.

그 밤에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이 있어요. “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”(눅 22:32). 이제 5:10을 보세요. 하나님이 “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.” 여기 “굳건하게 하다”가 스테리조예요. 예수님이 “형제를 굳게 하라” 하실 때 쓰신 바로 그 동사예요. 베드로는 지금 주님이 맡기신 일을 하고 있어요. 그런데 굳게 세우시는 분은 베드로가 아니라 “친히” 일하시는 하나님이세요.

편지 끝에는 두 이름이 나와요. “택하심을 함께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러하니라”(5:13). 바벨론은 이미 수백 년 전에 무너진 제국의 수도예요. 요한계시록처럼(계 17:5; 18:2)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 권력의 중심, 곧 로마를 가리키는 말로 많이 봐요. 그리고 “내 아들 마가”는 첫 선교 여행 중에 돌아가 버려서 바울과 바나바가 크게 다투게 만들었던 그 마가예요(행 13:13; 15:37-39). 베드로가 감옥에서 풀려나 찾아간 집도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이었어요(행 12:12). 넘어졌던 베드로가 넘어졌던 마가를 “아들”이라고 불러요.

※ “바벨론”이 로마를 가리킨다는 것은 다수 견해이고, 메소포타미아의 바벨론으로 보는 견해도 있어요. 마가가 베드로의 통역자로서 들은 것을 기록했다는 이야기는 2세기 초 파피아스가 전하고 교회사가 유세비우스의 『교회사』에 인용된 전승이에요.

돌아보기
잠들고 넘어졌던 베드로를 친히 굳게 세우신 하나님이 나도 굳건하게 하심을 믿고, 오늘 깨어 기도합니다.
맺는 글
넘어졌던 “반석”이
산 돌이신 주님을 가리키다

베드로전서는 한 번도 흔들리지 않은 사람이 쓴 편지가 아니에요. 물에 빠지고, 주님을 말리고, 잠들고, 세 번 부인했던 사람이 쓴 편지예요. 그래서 고난 속에 흔들리는 성도들에게 “깨어라”, “굳게 서라”고 말할 수 있었어요. 자기를 붙들어 주신 분이 누구신지 알았으니까요.

베드로는 편지 전체를 이 한 마디로 묶어요. “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언하노라 너희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”(5:12).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, 산 소망을 주시고, 친히 굳게 세우시는 분은 모든 은혜의 하나님이세요. 나그네 길이 고단해도, 우리에게는 부활하신 예수님이라는 산 소망이 있어요.

“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
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” (1:3)

※ 본문 인용은 개역개정을 기준으로 했습니다.